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프리카 전역 (문단 편집) == 사막의 여우 롬멜 == || [[파일:rommel.jpg|width=100%]]{{{#000 [[에르빈 롬멜]] 장군}}}[*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해 사진기를 자주 들고 다녔다. 그래서 주변 동료들로부터 '사진작가'라고 놀림 받곤 했었다. 그가 자주 들고 다니던 사진기는 [[라이카(기업)|라이카]]3형 레인지파인더 카메라로 선전장관 [[괴벨스]]에게 선물받은 것이다. ] || 앞서 언급했듯이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과 [[그리스 침공]]에서 보여준 이탈리아군의 추태를 비웃으며 '''"[[지중해]]는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히틀러 입장에서는 [[독소전쟁|소련 침공]]에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탈리아가 다른데서 뭔 짓을 하건 신경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독일의 입장을 번복할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으니 영국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당시 독일 해군이 지중해까지 가서 작전을 펼칠 수 없는 이상 지중해에서 믿을만한 건 이탈리아 해군이었는데 그나마도 타란토 공습으로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지중해에 대한 제해권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된 상황이었다. 이는 영연방군이 남부 유럽 지역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고민에 빠졌다. 당시 히틀러 입장에서는 지중해 지역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지중해 지역을 방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장고 끝에 소련 침공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대기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헤르만 괴링]]에게 지시하여 제10항공군을 편성하여 이탈리아에 파견하여 영국의 해상보급선을 봉쇄하게 하였고, 에르빈 롬멜 중장을 [[독일 아프리카 군단|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이탈리아군을 돕게 하였다.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협력하는게 아닌 독일 지휘관이 이탈리아군을 지휘하는 편이 독일한테 이득이었는데[* 병사들은 놔두고 지휘관을 바꿨을 뿐인데 전황이 180도 바뀐 사례는 은근히 많다.] 문제는 이탈리아군이 가진건 차량과 기본적인 무기로 무장한 보병뿐이었고 결정적으로 영국기갑을 상대할 대전차 수단도 '''없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군단이 새로 편성됐고 당초 롬멜은 이탈리아군과 협력하여 '''방어선 사수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지만, 계속되는 패전으로 이탈리아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데다 초기 이탈리아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역시 적응 안되는 무더위와 사막 특유의 가혹한 환경, 그리고 압도적인 영국군의 군세에 비교되는 2개의 기갑사단 지원에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방어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쳐 최대한 빨리 영국군을 최대한 밖으로 격퇴시키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정찰 및 정보수집을 통해 영국군 역시 패주하는 이탈리아군을 따라 깊숙히 추격해오면서 보급면에서 빈약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였다. 게다가 이 무렵 [[그리스]]에서 전투가 격화되는 바람에 영국군 일부 병력이 그리스로 차출되면서 전력도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에 롬멜은 방어가 아니라 영국군을 공격하여 최대한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수립하였다. 당시 롬멜은 충분한 양의 전차를 보급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부하들에게 굴러다니는 차량을 총동원해서 수백대의 가짜 전차[* 차 위에 나무판자를 덧대서 전차처럼 위장했다.]를 만들게 하였고 일부러 전차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대도시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영국 첩자들을 상대로 잔뜩 허세를 부렸다. 그 결과 첩보원들을 제대로 낚았고 3월 24일 '''사막의 여우의 전설이 시작됐다.''' 엄청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진격을 시작하자 영국군은 기겁하는 반응을 보였다. 독일군의 상륙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본대가 도착도 하지 않아 군단이라고도 할 수 없는 북아프리카 군이 이렇게 빨리 공세를 취할거라곤 생각조차 못한 상황이었는데 대규모 전차부대가 몰려오니 그야말로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내빼기 시작했다. 이에 롬멜은 영국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더 거세게 몰아붙여 '''불과 1주일만'''에 영국군을 800km 밖으로 몰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영국군은 10주나 걸렸는데 저 독일군은 1주일만에~~ 이 과정에서 오코너 중장[* 나중에 탈출하여 서유럽에서 7군단을 지휘한다.]을 비롯한 영국군 장군 3명이 [[포로]]로 잡혔고 낙오한 병력 상당수가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진군은 토브룩에서 멈췄다. 영국 수비대는 토브룩만큼은 절대 내줄 수 없다면서 완강하게 저항했고, 롬멜은 4월 말까지 공세를 퍼부었으나 번번이 좌절되는 바람에 발목이 잡혔다. 특히 토브룩 수비대는 수비지역이 항구라는 특성상 영국 지중해 함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을 받고 있었기에 쉽게 점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막에서 롬멜이 무리한 기동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수많은 독일 전차들은 모래 때문에 퍼져버렸고 병사들도 무리한 공격에 내몰렸다가 손해만 입고 있어 더이상 공격을 진행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반전이 있다면 '''이게 전부 제자리 걸음'''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토브룩은 처음부터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시작부터 심각한 병력 손실이다. || [[파일:Rommel).jpg|width=100%]]{{{#000 1941년, 전선을 시찰하는 롬멜 장군}}} || 어쨌든 고립된 토브룩만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주력부대는 토브룩을 공격하게 하고, 그 사이 일부 부대를 차출하여 카푸초, 바르디아 요새를 탈환하였다. 그리고 요충지였던 할파야 고개를 탈환하여 이 지점에 수비 거점을 세웠다. 어차피 방어선이 이탈리아 영토인 건 변함없었던 것. 한편 영국군은 롬멜의 공세가 정체된 덕분에 간신히 병력을 재정비할 수 있게 되었고 전열을 가다듬어 토브룩에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